고우석 뒤에도 그녀 있었다...야구 2000억 계약 이끈 ‘한국의 보라스’

고우석 뒤에도 그녀 있었다...야구 2000억 계약 이끈 ‘한국의 보라스’

[강호철의 스포트S라이트] 에이전트 이예랑
고우석·고영표 등 메가톤 계약 이끌어
2015년부터 계약 총액만 2000억 넘어


올해 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입단한 고우석,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이정후는 모두 국내 스포츠 에이전트 이예랑 대표가 운영하는 리코스포츠에이전시 소속 선수다. 이예랑 대표는 "에이전트와 고객인 선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강조했다. / 장련성 기자
국내 선수들이 꿈의 무대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때나 그 동안 땀 흘린 선수들이 그 대가로 대박 계약을 터뜨릴 때마다 어김 없이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리코에이전시의 이예랑(44) 대표다. 그는 2023시즌 후 김재윤(34·삼성) 안치홍(34·한화) 양석환(33·두산) 임찬규(32·LG) 고우석(26·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고영표(33·KT)의 대형계약을 잇달아 성사시키며 올 스토브리그를 뜨겁게 달궜다. 그가 올 겨울 성사시킨 계약 총액 규모만 해도 약 500억원에 이른다.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났던 지난 23일, 마침 고영표의 비(非) 다년 100억원대 계약 소식이 들려왔다.

“고영표 선수에게 전화가 왔어요. ‘나 대학 졸업하고 프로 됐을 때 이런 날이 올 줄 생각했냐’고. 데뷔 첫 완투승했을 때 샴페인으로 축하해 줄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한창 젊을 때 저와 인연을 맺었던 선수들이 FA가 되어서 좋은 대우를 받고, 또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묘해요. 마치 조카가 성장하는 모습을 쭉 지켜본 것 같아요.”

이 대표의 올해 눈부신 활약으로 고우석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입단을 빼놓을 수 없다.

“12월에 파드리스와 줌 미팅을 하면서 계약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은 받았죠. 포스팅 데드라인 직전이었던 1월2일 오후 되어서야 빨리 미국으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시간이 너무 촉박해 일단 LG에 양해를 구한 뒤 일본을 경유하는 샌디에이고행 비행기를 탔어요. LG가 허락을 안 해주면 일본에서 다시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었죠.”


다행히 일본으로 가기 직전 비행기안에서 LG구단주의 허락이 떨어졌다. 일본에서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마감시한(1월4일 오전 7시) 4시간 전에야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고우석은 그때부터 메디컬테스트를 받느라 시내 병원들을 분주히 돌아다녔고, 그 동안 이 대표는 계약서를 차근차근 검토했다. 최종 계약 승인이 떨어진 것은 포스팅 마감시한 7분전. 2+1년 총 940만 달러(2년 450만달러 보장) 계약서가 힘들게 손에 쥐어졌다. 이 대표는 “비행기에서 잠시 눈 붙인 게 전부였다. 1박 4일 출장이라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올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한 이정후(26)는 국내 매니지먼트 관리만 맡고 있다. 이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관계를 맺었던 이정후가 지금까지 성장하는데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 기쁘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예랑 대표가 지난해 12월 11일 열린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롯데 자이언츠 단장에 새로 선임된 박준혁 단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대표는 구단들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에이전트 중 하나다. 이 대표는 "보통 계약협상을 할 때 10개 이상의 제안을 준비했다가 하나씩 제시하면서 구단의 생각을 파악해 접점을 찾는다"고 했다. /뉴스1
스포츠에이전트는 흔히 ‘선수에겐 천사, 구단에겐 악마’라고 불린다. 모 구단 관계자가 국내프로야구에서 가장 많은 고객을 보유한 이 대표를 “아내와 딸, 다음으로 가장 무서운 여자”라고 표현할 정도다. 이 대표의 위력이 발휘된 것은 2022년 시즌 후. FA(자유계약선수) 시장에 주전급 포수 4명이 나왔는데 그 중 3명이 이 대표의 고객이었다. 세 선수를 영입하려는 각 팀의 제시액이 저절로 이 대표의 귀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이 대표는 당시 상황에 대해 “남들은 꽃놀이 패라고 하지만, 한 고객이라도 자신이 손해 본다고 느끼면 절대 안 된다. 서로 이익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 협상마다 최선을 다하는 게 내 역할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2020년 안치홍이 롯데와 FA 계약을 맺을 때 당시 국내에선 전례가 없었던 2+2년 ‘상호 계약연장 조항’이라는 독특한 계약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국내 프로야구에선 구단 역시 모기업에 보고할 명분이 필요하다. 당시 얼어붙었던 시장에서 돌파구를 찾은 게 그런 방식의 제안이었다”라고 했다. 당시 신선한 자극제가 된 안치홍 계약을 계기로 KBO규정이 고쳐져 지금은 선수들이 각종 조건이 달린 계약을 하는 게 보편화됐다. 임찬규가 올해 FA계약으로 LG에 잔류했을 때 조건이 4년 50억원에 계약을 맺었는데 인센티브가 24억원으로 절반에 가까웠다. 총액을 키우고 싶어하는 선수와 기량에 여전히 의문 부호를 붙이는 구단 사이에서 절충을 찾은 결과다.

“저는 협상할 때 10개 정도 제시안을 마련해놓고 구단과 협상을 하면서 접점을 찾아요. 물론 최종 결정은 선수 본인이 하는 거죠. 저는 우리 선수들을 정말 존경해요. 자기 분야에 대해 누구보다 진심이에요. 제가 일하면서 느끼는 자부심은 선수들, 고객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 대표가 에이전트 생활을 하면서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에이전트로서 1호 고객인 김현수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했을 때 정말 기뻤어요. 제 첫 계약이기도 했고, 김현수 선수도 좋아했어요. 가끔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내가 좀 더 경험이 많았다면 어떤 것을 더 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봐요. 사실 가장 행복하고 감동 받을 때는 내가 힘들 때나 좋은 일 있을 때 선수들이 개인적으로 메시지 보내줄 때인 것 같아요. 저는 선수들이 은퇴해도 계속 옆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에이전트가 되고 싶어요.”

이예랑 대표에게 ‘아픈 손가락’은 강정호(37)다. 3차례 음주운전과 뺑소니 등 사생활에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유망하던 메이저리그 생활이 일찍 끝났다. 2020년 KBO에 복귀하려 했지만 여론의 거센 반발로 결국 무산됐다. 이 대표는 “강정호가 잘못했고, 모든 것을 용서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 “에이전트는 고객이 어려울 때 보험처럼 함께 있으면서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가 더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강정호는 은퇴 후 미국 LA에서 ‘강정호 아카데미’를 설립해 아마추어와 프로선수들의 타격을 돕고 있다.

2023년 8월 메이저리그 LA다저스와 마산 용마고 투수 장현석이 입단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왼쪽부터 딘 킴 한국 담당 국제 스카우트, 존 디블 태평양 지역 스카우팅 디렉터, 장현석, 이예랑 리코스포츠에이전시 대표. 이 대표는 "장현석과는 중학교 3학년때부터 인연을 맺었고, 평생을 함께 할 수도 있는 친구"라며 "미국생활에 순조롭게 적응하는 것 같아 기대가 된다"고 했다. /연합뉴스
이예랑 대표는 자신을 박병호(왼쪽)와 김현수 전문가라고 말한다. 이들의 성격, 사소한 버릇 등도 모두 알고 있다고 한다. 박병호는 이 대표가 회사를 차린 뒤 광고계약으로 첫매출을 올린 선수이며, 김현수는 에이전트로서 처음 맞이한 고객. 두선수는 모두 메이저리그 무대를 누볐다./리코스포츠에이전시
승승장구하던 이 대표에게도 힘든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최근 2~3년 전 갑자기 선수들의 계약과 사업 밖에 없는 자기 인생에 공허함을 느꼈다고 했다.

“저는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선수 계약으로 기억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지만, 내 삶에 어떤 가치를 두고 사는지 약간 혼란도 왔어요. 몇 달 동안 많은 생각을 하다가 그게 내 삶이었고, 내가 선택한 삶이다, 그 페이지를 다른 사람들 이름이 장식하고 있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리코에이전시가 2015년 이후 지금까지 이뤄낸 계약 총액은 2000억원을 웃돈다. 하지만 에이전트 수수료(5%)로는 2020년까지 회사 운영비 마련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전 ‘에이전트나 해볼까’라고 덤벼드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해요. 에이전트라는 직업 만만치 않거든요. 남들은 시즌 후 두세 달 일하는 직업으로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선수와 계약해도 어느 정도 수익을 낼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인내심도 필요해요. 무엇보다 에이전트는 고객인 선수, 그리고 상대인 구단과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리코에이전시는 청담동 영동대교 근처 사무실에서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10년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대표는”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게 더욱 진득하게 믿음을 주는 것 같아서였다”면서도 “이젠 옮길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회사 창립 당시 야구 한 종목 10명 가량이던 고객이 이젠 8종목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우리 회사는 선수들 때문에 컸어요. 그런데 선수들이 힘을 더 가지려면 회사가 더 탄탄하게 성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1년 동안 고민 많이 했고, 회사도 좀 안정이 됐으니 좀 더 공격적인 마케팅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에이전시가 아니라 종합적인 스포츠마케팅 회사로 키워가고 싶다는 꿈을 이제 꾸기 시작했습니다.”

기사제공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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